문화유산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다
문화유산은 이제 더는 박물관 안에 전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문화유산은 디지털로 아카이빙이 되기도 하고, VR, AR 등의 기술을 접목한 실감형 콘텐츠로 제작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문화유산을 디지털화하는 ‘디지털 헤리티지’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문화유산의 디지털 아카이빙부터 활용 콘텐츠 개발까지 아우르는 세계적인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 기업 ‘문화유산기술연구소’의 김진산 책임연구원을 만나 디지털 헤리티지의 필요성과 이를 담당하는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가’는 어떤 직업인지 알아보았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문화유산기술연구소 실감경험개발팀 김진산 책임연구원입니다.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예술 작품들에 다양한 미디어 기술을 접목해 그 속에 담긴 진정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미래세대에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유산기술연구소는 어떤 곳인지,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희 문화유산기술연구소는 TRIC(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for Culture & Heritage)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이름 그대로 문화유산과 기술을 융합하는 일을 하는 회사입니다. 보존 가치가 높은 예술품들의 디지털 트윈*을 만들어 정밀하게 기록, 보존하고 이러한 데이터 아카이브 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파생 결과물들을 만들죠.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 미디어아트 같은 트렌디한 실감형 전시 콘텐츠 개발에서부터 디지털 자원을 활용한 실물 유물 복제와 복원 연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회사 내에서 다양한 센서와 미디어를 활용한 피지컬 컴퓨팅을 통해 문화유산과 사람이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기술들을 연구 개발하고 박물관 전시 등 상용 서비스에 적용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트윈: 디지털 방식의 재현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가’는 어떤 직업인가요?
‘디지털 헤리티지’에는 다양한 정의가 병존합니다. 문화유산의 원형을 디지털로 기록한 데이터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이러한 데이터를 활용해 문화유산에 대한 분석이나 보존, 복원 연구를 진행하거나 콘텐츠 등으로 개발해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를 돕는 행위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는 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러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두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가로 활동하는 분들의 전공이 궁금합니다. 주로 공부하는 분야가 무엇인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디지털 헤리티지라는 분야가 생각보다 세분화되어 있고, 다양한 전공자들이 협업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전공 분야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저희 회사의 경우 문화재보존과학, 건축, 사진, 도예, 동양화, 서양화, 조소, 영상, 컴퓨터공학, 문헌정보, 미디어디자인, 조경학, 게임, 애니메이션 등 한 사람도 겹치는 분야 없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데요. 전공은 다양하지만 모두 문화예술과 헤리티지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가장 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최신 문화콘텐츠 트렌드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화, 드라마, 게임 등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차용하기도 하고, 국내외 전시도 함께 보러 다니며 작품의 기획 의도나 제작 기술 등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화유산기술연구소에서는 문화유산의 디지털 복원부터 콘텐츠 제작까지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나요?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우선 공통적으로 모든 프로젝트가 해당 문화유산을 깊이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어떤 문화유산을 다루게 될지 고고학적, 미술사적, 철학적 관점에서 깊은 관심을 갖고 공부합니다. 알아갈수록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와 놓쳤던 디테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없던 애정도 절로 샘솟게 되죠.
그 이후 프로젝트에 대한 전체 기획을 합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주도하지만 프로젝트 구성원 모두가 기획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내면서 각자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어떻게 협업을 하게 될지 이해합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이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소통 오류로 인한 시행착오나 일정 지연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기획이 완성되면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이나 표현 기법이 뭘까 고민하고 최적의 방법을 찾아 접목합니다. 결과물이 완성되면 여러 번 시범 운영과 테스트를 통해 오류를 발견하고 원인을 밝히는 과정을 거칩니다. 사실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기획이나 개발보다도 이 담금질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느냐가 프로젝트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헤리티지 콘텐츠를 제작하실 때, 어떤 점을 가장 신경 써서 작업하시나요?
아무래도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왜곡 없는 현상 그대로의 반영과 기획 단계에서의 철저한 고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역시 ‘재미’입니다. 교육도 좋고 가치 전달도 좋지만,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지 않으면 말하고자 하는 그 어떤 내용도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재미라는 것은 꼭 즐겁고 가벼운 것뿐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멎게 하는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가슴을 뛰게 하는 음향효과 등 관람객의 흥미를 끌어 콘텐츠에 몰입하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말합니다. 대상 문화유산에 어떤 요소를 가미해야 재미있고 매력적인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지 항상 고민하고 신경 쓰고 있습니다.
문화유산을 아카이빙하고 콘텐츠화하는 디지털 헤리티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여 아카이빙하는 이유는 문화유산의 현상을 가장 정확히 보존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실물 문화유산은 물리 화학적으로 계속해 변화하지만, 디지털 데이터는 기록 시점을 기준으로 블랙박스와 같이 저장되기 때문에 대상물이 훼손/파손된 위치가 어디인지,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화면을 통해 비교적 손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가상 복원을 하거나 시간이 흐른 뒤 추가로 훼손된 범위를 비교하여 보존 상태를 확인하고, 보존 상태에 알맞게 조치할 수도 있습니다.
또 콘텐츠로는, 석굴암처럼 실존하지만 실제로 들어가 볼 수 없는 문화유산들을 가상으로 걸어 다니며 체험할 수 있게 하거나, 지금은 훼손되어 원형을 짐작하기 어려운 문화유산을 가상 복원해 과거의 생생한 모습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문화유산은 실물 자체가 매우 접근하기 어렵고 세심하게 다뤄야 하는 보물인 만큼 디지털 기술이 그 어떤 분야보다도 이롭게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접 제작하거나 관람했던 디지털 헤리티지 콘텐츠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수행해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장 최근에 특별전을 마친 익산 미륵사지 석등 복원 콘텐츠입니다. 석등은 사실 진리를 구하는 불교의 핵심 가치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탑이나 불상에 비해 대중의 관심도가 떨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등의 파편들이 백제시대의 절터인 미륵사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파편들에 대한 디지털 스캐닝을 토대로 여러 가지 복원안을 만들고, 다양한 센싱 기술을 접목해서 관람객들이 직접 복원을 해보거나 점등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콘텐츠를 제작했습니다. 수 톤에 달하는 실제 석재 유물로 조립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디지털 헤리티지를 통해 가상으로 조립할 경우 다양한 경우의 수와 방향, 각도 등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컨트롤러를 움직여 직접 복원해본 석등에 불이 밝혀지는 순간, 웅장한 종소리와 함께 나타나게 되는 천사백 년 전 미륵사를 보며 감동하는 관람객들의 표정에 개발자로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현재 디지털 헤리티지 콘텐츠에서는 어떤 기술이 가장 활발히 활용되며, 앞으로는 또 어떤 기술을 접목한 디지털 헤리티지 콘텐츠가 새롭게 등장할 것으로 예상하시나요?
최근까지는 박물관 등 전시현장에서 가상/증강/확장 현실이나 미디어 파사드, 프로젝션 맵핑 등 다양한 실감형 미디어 기술들이 활발히 활용되어왔고, 팬데믹 이후에는 온라인에서 다중접속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메타버스가 가장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AI(인공지능) 등을 활용한 훼손 부위 복원이나 초해상화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된 콘텐츠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의 사진, 그림, 화풍 등에 대한 빅데이터 학습을 기반으로 더 실제와 같은 시각적 효과를 만드는 기술들이 이미 많이 연구되어 있습니다. 데이터를 보존하고 원형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 멸실부를 재구성하고 기존 데이터를 고도화하는 기술과 콘텐츠가 중점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앞으로 문화유산기술연구소가 꿈꾸는 미래 방향성과 목표는 무엇인가요?
저희 문화유산기술연구소는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함께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보전해 나가고자 하는 지구촌 곳곳의 문화유산에 첨단 기술들을 접목해 영구히 보존하고, 흥미로운 콘텐츠로 개발해 인류가 문화유산을 언제 어디서든 더욱 가깝고 친근하게 향유하며, 과거와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 어려워진 해외여행과 중동과 동유럽의 전쟁 등으로 인해 더욱 접근성이 떨어진 세계 문화유산에 대한 디지털 헤리티지 프로젝트를 여러 해외 기관과 협력하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또 실물 문화유산뿐 아니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문화유산에 대한 문헌 기록과 신화, 전승을 토대로 가상 세계인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계림’ 프로젝트 같은 대형 상업 미디어아트전시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쌓아 궁극적으로는 미국과 프랑스의 경쟁 기업들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고의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기업이 탄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시뮬라크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가를 꿈꾸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디지털 헤리티지라는 분야가 아직 생소하다 보니 정확히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또 디지털 헤리티지 전문 회사에서는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평소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문화유산의 범위는 무궁무진합니다. 인류가 향유했던 모든 문화가 시간이 지나면 유산이 됩니다. 과거의 것들이 그랬듯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도 문화유산이 될 것이고 이에 대한 해석과 표현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이 분야는 꼭 특정 분야의 전공이나 자격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문화유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있으시다면, 자신이 가진 지식과 노하우로 그 애정을 타인과 미래 세대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면,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